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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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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2월에 열린 선진 7개국 재무장관회담(G7)에서 「이 이상의 달러가 하락(달러당 150엔 전후)은 각국의 경제성장을 저해한다」하여 통화 안정에 관해 정리한 합의. 파리의 구 루브르 왕궁에 있는 프랑스 재무성이 회의의 무대가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되었다. 이 G7은 85년 9월의 프라자 합의에서 대외불균형 시정을 위해 달러약세로 유도한 것을 계기로 열렸다. 합의의 요점은 ① 각국통화의 변동에 유연한 허용범위(상한과 하한의 설정) ② 그것을 초월했을 때는 해당 통화당국이 협의한 다음 시장개입, 각국은 협력한다 등이다. 


1. 개요

Plaza Accord, Plaza Agreement

1985년 9월 22일에 프랑스독일(서독)영국미국일본의 재무장관들이 뉴욕 맨하탄의 센트럴파크 남단 5번가에 1907년에 지어진 플라자 호텔[1] 에서 진행한 합의로 미국이 인위적으로 달러의 가치를 떨어뜨리려 다른 나라 화폐들(특히 일본 엔화)의 가치를 올린[2] 일종의 환율 조정 합의.

1980년대초 일본은 자국의 압도적인 기술력을 바탕으로 전자제품을 미국으로 수출하고 있었으며 그중 SONY의 워크맨이 미국에 돌풍을 일으켜 엔저를 등에 업고 엄청난 무역흑자를 기록하자 경상수지적자에 시달리던 미국은 본 합의를 통해 250엔이였던 엔달러 환율을 120엔으로 조정하여 일본의 수출경쟁력을 낮추는데 성공한다.

이를 통해 미국은 당시 경제적, 문화적으로 미국의 입지를 슬슬 침범하던 일본을 성공적으로 저지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신 일본은 엔고 현상, 부동산 경제버블 등 엄청난 경제 타격을 입어 이후 그 여파가 20년간 이어져 소위 '잃어버린 20년'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이 때문에 플라자 합의를 '일본에 대한 미국의 경제적인 원폭투하[3] '라고 평하기도 한다. 한편 한국은 여전히 원화 가치가 낮았으므로 일본 엔화와 비교하여 가격 경쟁력을 갖추어 수출 경쟁력이 커짐으로써 큰 수혜를 보았다.

이와 관련되어서 한 디시 유저가 요점만 집어 정리한 글이 있다.

2. 배경

1971년 닉슨 쇼크로 불리는 미국 닉슨 대통령의 금본위제도 폐지 선언으로 전 세계 물가와 원유 가격이 급격하게 상승했다. 미국 달러의 가치는 추락하였고 70년대 내내 스테이그플레이션이 나타났다. 마침내 1979년 8월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에 취임한 폴 볼커는 스태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전격적으로 금리를 급격하게 끌어올렸다.

금리인상으로 인해 1960~70년대 당시 서구권으로부터 돈을 빌렸던 페루, 아르헨티나, 브라질, 소말리아, 이집트 등 수많은 제3세계 국가들은 달러가 미국으로 회수되면서 높아진 이자로 인해 외채가 불어나면서 국가 파산의 길로 접어들었고, 1980년대 중남미 외채파동의 원인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서구권에서 돈을 끌어다가 공장을 지었던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동독, 루마니아, 불가리아, 폴란드도 경제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아 1989년 동구권 붕괴에도 영향을 끼쳤을 정도였다. 한국도 이 당시에 세계 순위권에 들 정도로 외채가 엄청났기에 자칫 국가 파산의 길로 접어들 뻔했다.[4]

이때 제3세계 국가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지만 미국 내에서도 이자율 급등으로 중소기업들이 자금을 빌려서 쓰기 힘든 상태가 되었고, 대기업들도 사업투자를 하는데 써야 될 이자 부담이 늘어나는 통에 제조업에 대한 투자가 위축되어 한때 세계의 공장 소리를 듣던 미국의 제조업은 파산상태로 내몰렸다.

이처럼 1979년부터 1981년까지 극심한 불황과 기업 구조조정 증가, 실업률 증가와 같은 고통이 있었지만 이 기간 폴 볼커가 강행한 엄청난 기준금리 인상은 기축통화국인 미국이 세계의 소비국가가 된 이후 발생한 달러 통화량 증가에 따른 달러 가치 하락에 대한 대응책이었다. 연방기준금리가 과격하게 올라가자 글로벌 시장에 풀린 미국 달러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기 시작하며 국제 원자재 가격이 내리고 물가가 잡혔다. 달러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통화긴축, 고금리 정책을 펼쳐 달러 가치를 지켜내고자 한 것이었고 실제로 3년의 고통스런 기간을 거치고 1983년부터는 미국의 인플레이션이 급속히 진정되면서 미국달러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었고 미국의 패권은 크게 강화되었다.

달러를 국가 간의 무역 거래에 사용하려면 그만큼 달러를 많이 찍어내 전 세계에 공급해야 한다. 기축통화인 달러의 국제유동성을 유지하기 위해 기축통화국인 미국은 국제수지 적자를 지속해야한다. 하지만 달러를 많이 발행하면 그만큼 달러의 가치가 하락하고, 그렇다고 달러의 발행을 줄이면 달러의 공급 부족 현상에 직면하게 되고 그러면 국제무역과 자본거래를 제약해 기축통화국의 지위를 위협받을 수 있다. 이를 '트리핀 딜레마'라 부른다. 이런 상황에서 폴 볼커는 고금리 정책을 펼침으로써 달러의 가치를 유지시키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로 인해 무역적자가 심각하게 커지게 되었다. 닉슨 쇼크 이후 고정환율제가 무너지고 생겨난 변동환율제하에서 달러 가치가 오르면 상대적으로 다른 나라 화폐 가치가 떨어지므로 미국의 수입량은 증가하고 미국의 수출량이 감소하는 현상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으로 일본은 자국 화폐(엔화)의 저환율 상태를 통해 미국에 엄청난 무역흑자를 일으켰고, 경제대국으로 성장해 나갔다. 미국은 공산품에 대한 수입을 늘릴 수밖에 없었고 일본이 이 시기에 서독을 넘어서는 제조업 최강국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이렇게 크게 늘어난 미국의 대일/대독 적자는 1982년 들어 금리가 이미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줄어들지 않았다.

단적으로 무역수지만 봐도 역대급 호황을 누렸다던 클린턴 시기를 포함해서 1980년 이후 미국은 무역적자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5]

막대한 무역적자에 더해 1981년에 취임한 레이건 대통령은 감세와 경기 활성화를 위한 재정 지출을 늘였다. 통화당국(미연준)은 냉각기를, 행정부는 온풍기를 튼 셈이었다. 정부와 통화당국의 엇박자로 스텝이 꼬이면서 무역적자와 재정적자가 같이 나타나는 소위 '쌍둥이 적자(twin deficits)'가 심해지고 있었다. 미국은 이런 상황을 단번에 반전시킬 카드가 절실했다.

결국 미국은 1985년 9월 22일,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서 G5 재무장관들과의 회의를 통해 일종의 환율 조정을 진행한다.

2.1. J 커브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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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이론적으로 미국의 환율 약세를 뒷받침하는 이론이 대두되었다. 텍사스 대학의 스테플 메기 교수가 주장했던 J커브 효과(J-curve Effects)였다. 즉, 환율이 변해 한 나라의 통화 가치가 오를 경우 수출/수입의 수량변동이 변하는 속도가 실제적으로는 느리며, 수입품에 대한 기존 수요가 한동안 유지되기 때문에 초반에는 오히려 무역적자가 악화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결국 시간이 지나서는 유의미한 변동이 온다는 이론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이 알파벳 J 모양과 유사하여 J커브 이론이라고 한 것이었다. 환율 수지가 수출입량 변화로 나타나는 이 시간은 대략 6~18개월(0.5~1.5년, 평균 1년(12개월)) 정도로 추정되었다.

반면 이 이론에 대한 비판적 견해도 많았다. 실제로 이 변화가 무역수지와는 별개로 엔화와 마르크화의 공세적인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또 대한민국의 원화가 좋은 예로, 1980년대 초반 "원저"는 한국 수출에 큰 득이 되지 않았다.

3. 합의

당시 미국 내의 여론은 이런 악화된 무역수지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반일감정이 일어났으며, 자동차를 필두로 한 미국 제조기업들과 농민들은 강한 보호무역 정책을 펴든지 아니면 다른 대책을 내놓든지 하라고 정부를 강하게 압박했고, 이를 버틸 수 없었던 당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1985년 9월 22일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열린 G5(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일본) 재무 장관 회의에서 이 달러 강세 문제를 해결하자고 주문하였다. 이 재무장관 회의에서 도출된 결과는 각국 정부 개입에 의한 환율 조정이었고 해결은 겉보기에는 원만하게 이루어졌다.

당시 대장대신이었던 다케시타 노보루는 여기에 서명하고 돌아온 뒤 "미국이 일본에 항복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후에 이 발언은 일본 내의 정치적 반발을 잠재우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후 다케시타는 이 발언이 실수였다고 인정했다. 출처 

4. 합의의 영향

이후 플라자 합의가 채택되자 독일 마르크화는 채택 1주 만에 약 7%, 엔화는 8.3%가 각각 상승했고[6], 이후 2년 동안 달러는 30% 이상 급락하게 된다. 이 달러 약세로 인해 미국의 제조업체들은 가격 경쟁력을 회복하였고, 미국의 대유럽 무역적자도 줄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엔화 대비 달러의 가치가 50%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일적자는 크게 해소되지 않았다. 무역수지가 개선되기 시작한 것은 J 커브 이론의 시한인 1년 반을 훌쩍 넘은 2년 뒤인 1987년 말이었다.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일본의 시장개방이 제한적이었고 일본인들의 소비성향도 폐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특히 빌 클린턴 집권기를 보면 미국이 일본에 시장개방을 강압한 적이 많았다.

이후 효고현 남부 지진으로 인해 벌어진 엔고 상황[7]에서 엔저를 유도하기 위해 1995년 4월 역 플라자 합의가 성사되었다.[8]

여담으로 플라자 합의로 1986년도부터 1989년도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경상수지 흑자를 보는 등의 이익을 보았는데 일본과 수출 경쟁품목이 많은 상황에서 엔화의 가치가 상승하여 상대적으로 원화 가격이 싸졌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도 유가하락, 금리인하, 1988 서울 올림픽으로 인한 투자확대 등이 동시에 맞물렸고, 이때의 호황을 저유가, 저금리, 저환율이 맞물렸다고 해서 3저호황이라고 한다. 이 시기에 한국은 물건이 없어서 못판다고 할 정도로 수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사상 최초로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였다. 또한 한때 외채망국론이 나올 정도로 심각했던 외채가 불과 3~4년만에 절반으로 줄어들었다.[9] 이런 호황은 한국 뿐 아니라 신흥국 상당수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중국도 개혁개방 정책과 맞물려서 상당한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대만, 태국도 이 시기가 역사적인 호황기로 손꼽히며,[10]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경우에는 자원에 의존하는 비율이 상승했지만 그럼에도 제조업 육성으로 자원값 하락에 따른 손해를 모두 메꾸고도 남는 성과를 올렸다. 물론 모든 개도국이 호황을 누렸다는 뜻은 아니라서 브라질이나 멕시코는 물가상승이나 외채, 악화되어가는 빈부격차로 여전히 골머리를 앓았고, 상술하듯이 소련이나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를 비롯한 동유럽 각국도 여전히 골골거리기는 매한가지로 이러한 후유증은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또한 이 합의는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의 직간접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된다. 플라자 합의로 일본의 수출이 감소하면서 성장률이 크게 떨어지자, 일본 정부는 경기 부양책을 위해 금리 인하와 부동산 대출 규제 완화책을 썼다. 이 결과 그렇지 않아도 이미 1980년대 초부터 팽창 분위기였던 일본의 부동산 시장과 주식시장에는 엄청난 거품이 생기게 되었고, 이것이 1980년대의 거품경제로 이어진 것. 물론 이 거품경제와 엔고로 미국과의 경제력 격차가 오히려 크게 좁혀지고 일본 자본이 오히려 엔고를 이용해 미국의 기업과 자산을 잇따라 사들이면서 미국내에서도 이거 우리가 일본에게 점령당하는거 아니야?라는 두려움섞인 반응이 나왔지만 1992년을 전후하여 일본의 경제가 침체기에 접어들며 한숨돌렸다. 아무튼 저 플라자 합의 때문에 독일과 더불어 경제적으로 거대한 타격을 입었다.

이 합의에 관한 대책으로 루브르 합의가 나왔으나, 각국의 이해관계의 불일치로 인해 별 소득은 없었다.

한편 플라자 합의 당시 대장성으로 불린 일본 경제부처는 90년대 후반에 여러 뇌물, 정경유착 스캔들로 신음하다, 2001년 일본 중앙 성청 개편을 통해 재무성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5. 평가

일본에서는 이 플라자 합의를 1987년의 미일 반도체 협정과 함께 1980년대 욱일승천하던 일본의 기세를 무너뜨린 두 원인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영미권은 (대표적으로 이코노미스트 지) 등 '플라자 합의 이후 일본 정부의 대처가 바람직하지 못 했기 때문에 그러한 사태가 일어난 것으로, 플라자 합의만을 탓하는 건 옳지 않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단적으로 똑같은 제조업 대국인 독일(당시 서독)은 플라자 합의에도 불구하고 일본식 버블이나, 장기침체에는 빠지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든다. 즉 플라자합의가 주요 원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야로 일본 경제사를 분석하는 이들은 당시 미국의 무역적자와 일본의 흑자가 단순한 환율 문제때문이라기보다는 노동 생산성이나 경제 구조 등 더 근본적인 원인이 존재했다 보기 때문에 플라자 합의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일본 몰락 원인을 플라자 합의 이후 수출경제 탈피와 경기 활성화 방안을 물색하는 과정에서 근본적 체질 개선에 실패하고 금리 인하를 통한 투자 유치 같은 악수를 둔 등 일본측의 정책에서 찾는다.

하지만 전후관계이든 인과관계이든 플라자 합의 이후 일본의 경제가 큰 타격을 받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독일이 이런 고환율 문제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재정정책을 잘 썼기 때문이라기보다는, EU가 창설되며 기존에 고평가된 마르크화에서 유로화로 통화가 바뀌었기 때문에 플라자 합의의 영향에서 운 좋게 벗어날 수 있었던 원인이 크다. 독일도 유로화가 쓰이기 전인 1990년대는 일본과 비슷한 경기침체를 겪고 있었다. 2000년대 초반 유로화가 전면적으로 도입되면서 독일이 잘나가기 시작했는데, 오히려 유로권 저개발국(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및 동유럽국가)들의 지지부진으로 유로화는 독일의 경제상황에 비해서는 매우 저평가 되었고, 이들 저개발국은 오히려 자국의 경제상황에 비해 유로화가 고평가되었기 때문에 손해를 보고 있었고 경제위기가 왔다. 결국 이들의 희생으로 독일이 잘나간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들 저개발국은 독일에게 좀 더 이런 저개발국에 재정기여를 하라고 주장하던 때도 있었다.

외국계 자본은 일본의 버블을 이용해 일본 부동산 시장에서 일본 GDP의 10배에 달하는 이익을 챙겼으며,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규모로 자국민의 돈이 직접적으로 해외로 유출되는 사건이었다.[11] 

6. 의의

미국이 경제, 문화적으로 자국의 지위를 위협하던 일본을 결정적으로 손봐줬다. 이는 일본(독일도 마찬가지)은 미국에 국방을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플라자합의는 미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합의임에도 일본은 어쩔 수 없이 합의를 해 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때 일본의 독주를 막음으로 한국 등 신흥국들이 큰 수혜를 입었다는 시각이 있다. 일본은 이때 무분별하게 자산시장을 부양해서 경기를 띄우다가 결국 장기침체의 길로 걸었지만 엔고 효과 덕분에 해외자산들을 많이 매입했다. 미쓰비시 그룹이 록펠러 센터를 매입한 것이나, 소니가 1989년 컬럼비아 픽쳐스를 인수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그 때 거품이 낀 엔화로 마구잡이로 매입한 해외 자산에 바탕한 경상수지 흑자는 2019년 기준 원화로 연 229조에 이른다. #

그러나 이런 부수적인 성과말고는 일본경제를 멍들게 한 주원인이 되었다. 1995년 이후 일본의 GDP가 10%도 늘지 않은데 비해 플라자 합의의 공동 당사자였던 독일의 GDP는 60% 가량 늘어났다는 점을 보면 플라자 합의로 인한 일본의 타격은 엄청났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일본은 관치금융등 금융당국의 여러 문제로 금융폭등을 제어하지 못해 위기가 점점 확대되지만, 독일의 경우 10년 간은 통일 비용 등 부진을 겪기도 했지만 EU를 구축하고 기존 자국 마르크화 대비 저평가된 유로화빨로 가격경쟁력을 얻은 제조업 활성화로 히틀러 사후 60년만에 다시금 경제력으로 유럽을 제패하여 제4제국을 만들었다는 평을 받을만큼 유럽을 제대로 휘어잡았다. 하지만 이런 일본과 독일의 차이는 결국 독일은 고평가된 마르크를 버리고 저평가된 유로화로 갈아타는 호재를 만났지만 일본은 엔화를 계속 탈 수밖에 없었다는 차이에 기인하기 때문에 독일이 운이 좋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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