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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노믹스의 원죄, '나쁜 엔저'의 역습 [최원석의 디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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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엔화 약세장엔 아주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일본 정치권·재계·언론이 전부 ‘나쁜 엔저(円低)’라면서 이를 막아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는데도, 이를 저지할 가장 강력한 수단을 전혀 쓰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강력한 수단이란,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日本銀行)의 금리 인상 카드입니다. 전문가들은 급격한 엔저의 주된 원인으로 미·일 금리 차 확대, 즉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하 연준)가 급격한 금리 인상을 예고하고 있는데도, 일본은행이 금리 인하를 고수하는 것을 꼽고 있습니다.

일본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분명해 보입니다. 일본은행도 금리 인상 신호를 내서, 미·일 간 금리 차이가 더 벌어지는 것을 막아야겠지요.

그런데 일본은행이 이번에도 금리 인상은커녕 강력한 돈 풀기(금융완화)를 지속하겠다고 천명한 겁니다. 어제(20일) 한때 달러 당 환율이 129엔대까지 치솟으며(엔화 가치 하락) 20년래 최저치를 기록했고, 조만간 심리적 저지선인 달러당 130엔을 뚫고 올라갈 것(엔화가치 추가하락)으로 보이는데도 말입니다.

4월20일 도쿄 외환거래소에 설치된 화면에 달러 당 엔화 환율이 128.221엔이라고 표시돼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20년 만의 최악 엔저라는데, 자국 통화 파수꾼이어야 할 일본은행이 오히려 엔화 약세 부추겨... 가장 강력한 수단인 금리 인상 카드 꺼내긴커녕 무제한 국채 매입 정책만 오히려 강화

지난 3월28일 일본은행이 (단 건이 아니라) 여러 날에 걸쳐 국채를 정해진 이율로 무제한 매입하는 ‘연속 지정(指定)가격 오퍼레이션’을 실시한다고 발표한 것이 엔화 약세에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새로 발행된 장기국채(10년물)를 일본은행이 0.25% 이율로 무제한 매입키로 한 겁니다. 실제로 일본은행은 3월 29~31일 연속으로 지정가격 오퍼레이션을 실시, 합계 6000억엔 정도의 10년물 국채를 매입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설명드려 볼게요. 일본 10년물 국채 금리는 작년 말까지도 0.01~0.05%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다 슬금슬금 오르더니 최근 들어 0.25%를 넘어가려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겁니다. 일본은행은 작년에 플러스·마이너스 0.25% 정도까지 장기금리 변동을 허용하는 한편, 금리가 급상승할 때는 0.25% 이율로 장기국채를 무제한 매입해 금리상승을 억제하려는 제도를 도입했죠. 10년물 국채금리가 0.25% 이상으로 오르는 것을 원천 차단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3월28일 금리가 0.25%를 넘어갈 조짐을 보이자, 일본은행이 실력행사에 나선 것이죠. 일본은행이 장기금리를 인위적으로 억누르겠다는 자세를 분명히 밝힌 것이니,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외환딜러들이 이렇게 생각했을 수 있죠. “미 연준은 금리를 빠르게 올리겠다는데, 일본은행은 금리 올릴 생각이 없다는 거네. 그럼 미·일 금리 차이는 앞으로 더 커지겠네. 그럼 엔화 가치가 더 떨어지겠는걸? 그럼 팔아야지!”

엔화를 시장에 계속 내다 팔면 엔화 약세(엔화가치 하락)가 더 심해지겠죠. 그러니까 일본은행이 지금의 엔화약세를 막기는커녕, 오히려 조장하고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자국 통화가치 안정을 최우선시해야 할 중앙은행이 그 역할을 버린 겁니다. 통화가치를 훼손하려는 포퓰리즘 정치세력에 맞서 국민을 보호하고 통화가치를 사수하는 게 중앙은행의 존립 이유일 텐데요. 그런 ‘통화 파수꾼’이 스스로 자국 통화가치를 떨어뜨리려 하는 겁니다.

최근에 비슷한 사례가 있긴 했습니다.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터키 리라화 폭락을 막겠다면서 금리를 오히려 낮춘 것이었죠. 통화가치 폭락을 막으려면 금리를 대폭 올려야 하는데 오히려 낮춘 겁니다. 결과는 리라화가 대폭락해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일본을 터키에 비유하는 건 아직 심하지만, 아무리 일본이라 해도 통화가치 하락 상황에서 무제한 양적 완화 지속이 웬 말이냐는 거죠.

그럼 일본에서 왜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지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엔저를 저지할 거의 유일한 수단을 가진 일본은행이 왜 엔저를 지향하는 것처럼 보이느냐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일본은행이 금리를 올리는 방법을 섣불리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단은 엄청난 평가손이 발생해 일본은행이 곧바로 엄청난 채무초과에 빠져버릴 우려가 있습니다. 2021년 6월말 기준으로 일본은행은 529조9000억엔어치의 국채를 보유하고 있죠. 이 가운데 장기국채가 499조2000억엔으로, 일본은행 국채 보유량 전체의 94%를 차지합니다. 2021년 상반기 일본은행이 보유한 장기국채의 평균 이율은 0.226%였습니다. 현재 10년물 국채금리는 0.25% 수준이므로, 이미 평가손이 발생합니다. 10년물 국채금리가 오른다는 것은 해당 국채 가격이 하락한다는 의미이고, 하락으로 인한 차액이 평가손이 되는 거죠. 후지마키 다케시(藤巻健史) 후지마키재팬 대표는 4월26일 자 주간 이코노미스트 인터뷰에서 “일본은행은 일본 정부가 발행한 국채의 절반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양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평가손도 그만큼 불어나게 되는 재앙을 맞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일본은행은 주식·채권의 평가 손익을 매년 5월 말 발표하는데요. 여기에서 채권이 크게 평가절하되면 세계 언론과 신용평가회사, 외국은행 등이 발칵 뒤집힐 수 있습니다. 그 시점에서 장기 금리가 계속 상승하고 있다면, 평가손의 크기에 시장이 더 큰 충격을 받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행이 지난 3월 말에 신규발행 10년 물 국채를 0.25% 금리로 무제한 매입하게 된 것일 테고요. 어제(20일) 한때 달러 당 환율이 129엔대까지 치솟으며(엔화 가치 하락) 20년래 최저치를 기록했는데도, 같은 날 일본은행이 4월 21~26일에 걸쳐 다시 연속 지정가격 오퍼레이션에 나선다고 발표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가 4월18일 일본 국회에 출석해 답변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아베노믹스와 일본은행의 장기국채 무제한 매입이 불러온 딜레마... 금리 조금만 올려도 국채가격 붕괴나 일본은행 부실화 우려, 금융완화 유지하면 나쁜 엔저 점점 심각해질 수도

즉 일본은행은 중앙은행 본연의 임무인 자국 통화가치 안정보다 자신들이 보유한 국채의 평가손을 피하려는 ‘방어전’을 치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구로다 일본은행 총재가 2013년 임명돼 일본 국채를 무제한 매입하는 양적·질적 금융완화전략을 펼치지 않았더라면, 이런 방어전이 필요 없었겠지만요. 현재로선 엔화환율 방어보다 일본은행의 국채 평가손 방어가 더 중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금융정책 방침으로 명시된 10년물 국채금리 변동폭 상한선 0.25%를 사수하지 않으면, 일본은행의 정책에 대한 신뢰가 깨져 금융시장 컨트롤 능력을 상실할 수도 있으니까요. 금융정책이 먹히지 않는 건 중앙은행으로선 최악이죠. 중앙은행의 파탄에서 끝나지 않고, 일본경제 파탄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일본은행이 두려워할 만한 사례도 최근 있었습니다. 호주 중앙은행은 3년물 국채 금리 목표를 0.1%로 설정했지만, 작년 10월 말 0.2%를 넘어서고 말았습니다. 호주 중앙은행이 그것을 방치하면서 한때는 단번에 0.5%를 넘기까지 했죠. 이후 호주 중앙은행은 금리 목표 달성을 포기하고, 시장에서의 호주 국채 폭락을 추인했던 겁니다. 결국 시장을 따를 수밖에 없었죠.

일본은행은 이 시나리오를 가장 두려워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일본 국채시장에서 호주 사례와 같은 일이 벌어지면 그 영향은 차원이 다릅니다. 국채시장 규모도 훨씬 크고, 일본은행이 안은 국채 금액은 일본 정부가 발행한 전체 국채 1000조엔의 절반이 넘기 때문입니다. 오바타 세키(小幡績) 게이오대학대학원 교수는 4월2일 자 동양경제 온라인 인터뷰에서 “일본은행이 호주 중앙은행처럼 국채이율 목표 사수를 포기하게 된다든지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면, 일본 국채시장에 엄청난 위기가 찾아올 수 있고, 위기 증폭의 끝은 일본 경제의 끝을 가리킬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일본은행은 엔화가치 폭락을 방치한다는 비판을 받더라도 정책 약속을 먼저 지키려 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일본 경제 상황이 바뀌어 이젠 거의 모든 경제주체가 엔화가치의 과도한 하락을 원치 않지만 말입니다. 일본은행도 이를 잘 알겠지만, 이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채 ‘나쁜 엔저’를 방치하고, 언제까지 지켜질지도 불안한 국채금리 약속 등을 사수하여야 하는 상황인 겁니다.

◇지금보다 더 본격적인 ‘나쁜 엔저’ 오면, 당좌예금 엄청나게 팽창시킨 일본은행과 정책 당국이 속수무책 될 가능성

일본은행이 안은 또 하나의 문제점이 있는데요. 급격한 엔저가 안 그래도 오르는 수입물가를 더 끌어올릴 것이고, 구로다 일본은행 총재가 임명된 2013년 이후 그렇게 부르짖었던 목표 물가 2%, 지난 9년간 제대로 달성하지 못했던 2% 목표를 자연스럽게 달성하고, 어쩌면 물가가 그 이상으로 오르게 될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거죠.

결국 국내 물가 상승, 해외 금리 상승 등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은행도 단기 정책금리를 올려야 할 시기를 맞을 수도 있는데요. 일본은행이 단기 정책금리를 올리는 방법은 현재로선 일본은행의 당좌예금 금리를 올리는 방법밖에 없다는 게 또 문제입니다.

일본은행의 당좌예금 잔고는 현재 543조엔인데요. 통상이라면 일본은행 내 당좌예금 잔고가 이렇게 많을 이유가 없지요. 일본은행 당좌예금이란 민간은행 등이 일본은행에 개설하는 예금을 말하는데요. 다만 일본은행 당좌예금에는 법률상 규정이 있어서, 민간은행은 가계·기업으로부터 맡은 예금액의 일정 비율을 일정기간 동안 일본은행 당좌예금에 적립해야 합니다. 이렇게 의무인 금액을 법정준비액이라 부르고요. 그것을 넘는 부분은 초과준비액이 됩니다.

일본은행 당좌예금이 543조엔이나 되는 것은 이 초과준비액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기 때문인데요. 2013년 구로다 일본은행 총재 임명 이후 시작된 양적·질적 완화는 일본은행이 주로 민간은행이 보유한 장기국채를 매입해 그 대금을 민간은행의 일본은행 당좌예금에 불입하는 방식으로 돈을 푼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은행이 공급한 돈이 시중은행의 여신 확대에 쓰인 게 아니라, 단순히 은행의 일본은행 당좌예금 계좌에 초과준비액으로 쌓여온 것이죠.

당좌예금 금리, 즉 민간은행이 일본은행에 맡긴 돈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죠. 2016년 1월 마이너스 0.1% 금리가 도입됐으니, 일본은행으로선 이자 부담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니냐고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법정준비액은 강제이기 때문에 무이자입니다만, 초과 준비액에는 현재 0.1%의 이자가 붙어, 일본은행으로부터 민간은행에 그 이자가 지급되고 있습니다. 일본은행 당좌예금 가운데 마이너스 금리 적용분은 전체의 5.3%에 불과하고요. 55.5%는 제로금리, 나머지 40% 가량은 현재도 연 0.1% 금리가 적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2021년 3월기 일본은행의 연간 당좌예금 이자 지급비용은 2179억엔이었습니다.

현재도 이 정도의 이자비용을 일본은행이 부담하고 있는데요. 일본은행이 출구전략을 쓰려면 당좌예금에 쌓이는 초과준비액이 시중에 유출되지 않도록, 당좌예금 금리를 올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시중 단기 금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당좌예금 금리를 2%로 인상한다고 치죠. 현재 당좌예금 잔고가 543조엔이니까 2%의 금리 인상으로도 10조엔 가량의 이자 비용이 증가합니다. 가토 이즈루(加藤出) 도탄리서치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4월5일 자 주간 이코노미스트 인터뷰에서 “2021년 3월기 결산의 일본은행 경상이익이 2조엔, 순자산은 4조5000억엔이니까, 약간의 금리 인상으로도 일본은행이 엄청난 채무초과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썼습니다.

요점은 일본은행이 금융 긴축을 하게 되면 일본은행 자신이 엄청난 채무초과에 빠져 버리는 겁니다. 채무초과는 중앙은행의 신용을 크게 추락시킬 수 있고요. 그러한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통화는 폭락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한편 채무초과를 무서워해 긴축을 회피하면 엔화 약세와 인플레는 더 가속하겠지요.

엔화 가치가 가파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다. 사진은 14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 보관된 엔화 지폐. /연합뉴스

◇호주 중앙은행 사례처럼 일본은행이 장기국채 금리 목표 포기하는 사태 터질지 지켜봐야... 일본은행과 헤지펀드간 치열한 수싸움도 예고

즉 일본은행이 일본 정부 발행의 국채 절반을 떠안고 있어 국채 금리 방어에도 나서야 하고, 단기 금리 인상을 위해 당좌예금 금리를 조금이라도 올리게 되면 일본은행 자신이 채무초과에 빠져 버리는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는 겁니다.

다른 각도로 접근해보면, 일본은행이 민간은행으로부터 장기국채를 사들인다 해도 정부+일본은행의 대(對)민간 채무는 단 1엔도 줄어들지 않지만, 장기국채가 일본은행 당좌예금이라는 대민간 채무로 변환됨으로써 정부 쪽의 대민간 채무가 장기에서 단기로 전환되는 효과를 낸다는 겁니다. 일본은행 당좌예금은 민간에서 보면 하루짜리 단기 국채와 비슷합니다. 따라서 정부+일본은행이 약간의 금리 상승에도 이전보다 훨씬 더 취약해지는 결과를 낳았다고도 볼 수 있죠. 지금보다 더한 본격적인 ‘나쁜 엔저’가 오면, 일본은행 당좌예금을 이렇게나 팽창시켜 버린 정부(일본은행 포함)는 속수무책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지금은 일본주식뿐 아니라 엔화 시장의 플레이어도 외국인이 주류이고 일본인 관계자는 해설 역할만 맡는 경우가 많습니다. 엔화 약세가 계속된다면 초단기 매매로 차익을 노리는 헤지펀드, 다음으로 글로벌 매크로계 헤지펀드 등이 들어와 시장을 흔들 수도 있습니다. 도시마 가즈오(豊島一夫) 도시마&어소시에이트 대표는 4월14일 자 니혼게이자이신문 온라인 인터뷰에서 “0.5%포인트의 연속적인 대폭 금리 인상이 각각 예상되는 5·6월의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 때까지 엔화 변동을 놓고 일본은행과 헤지펀드의 수 싸움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썼습니다.

그야말로 막다른 골목입니다. 금융 긴축의 수단 자체를 상실한 중앙은행은 엔화 약세를 막지 못하는 상황이고, 엔화 약세를 막지 못한다면 결국 악성 인플레이션에 빠지는 길로 가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2013년 시점에서 일본경제가 좋지 않았고, 그래서 구로다 총재가 새로 부임해 양적·질적 금융완화를 해서 일본 정부의 디폴트를 막았다. 국채를 엄청나게 발행해 국가 빚은 더 늘어갔지만, 자국 내에서 특히 일본은행이 국채를 대부분 소화해줬기 때문에 디폴트 위험은 크지 않았다. 다만 그 결과로 일본은행의 밸런스시트가 극단적으로 비대해졌다. 경기가 회복됐다면 밸런스시트 축소에 들어갔겠지만, 일본경제가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밸런스시트가 비대해진 지금 상황에서 금리를 조금이라도 올리게 되면, 일본은행이 채무초과 상태에 빠지고, 그 결과 엔화 폭락과 경제 파탄의 경로로 달려나가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물론 이건 최악의 상황을 상정한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나쁜 엔저’가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이번에도 일본이 위기를 넘길 가능성도 없지는 않고요.

다만 일본의 현재 상황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습니다. 정부가 세금을 쏟아붓거나 정치권이 독립 기관인 중앙은행까지 압박해 돈을 풀어봐야 대증요법일 뿐, 산업 구조를 바꾸고 효율과 경쟁력을 높여 GDP를 성장시키지 않으면 결국엔 백약이 무효라는 것이죠.

◇한국, 이대로 가면 일본의 정체 과정 고스란히 따라갈 수도... 아베노믹스, 성장전략 실효 못거둔채 양적완화만 남발... 일본을 반면교사 삼아 혁신 담은 성장전략으로 돌파구 열어야

구로다 일본은행 총재의 지난 9년간의 무제한 양적·질적 완화 정책은 아베노믹스의 ‘3개의 화살’ 전략에서 첫 번째 화살(재정 지출)에 이은 두 번째 화살이라 할 수 있는데요. 아베노믹스의 본질도, 첫 번째 두 번째 화살에 이어 결국은 세 번째 화살(성장 전략)을 제대로 쏴야 한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아베노믹스는 지난 9년간 두 번째에서 세 번째로 가지 못한 상황에서 미국발 고인플레·금리급등과 세계적 원재료 상승 등의 악재를 만나면서 일대 위기에 놓이게 됐습니다. 우에노 쓰요시(上野剛志) 닛세이 기초연구소 수석이코노미스트는 4월20일자 주니치신문 인터뷰에서 이번의 급격한 엔화 약세에 대해 “아베노믹스의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면서 “일본은행은 강력한 금융완화를 해 왔지만, (부유층이 윤택해지면 저소득층에 부가 흘러내리게 된다는) 낙수효과는 일어나지 않았고, 양적완화만 질질 끌어온 상황에서 문제가 터지고 말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이 축적한 부(富)는 아직 일본이 최전성기 때 모은 부의 양에 훨씬 미치지 못하죠. 그런 상황에서 일본의 과거보다 인구가 더 빨리 늙어가고 있습니다. 국가 채무 역시 빠르게 늘고 있고요. 올 들어 1분기 무역수지(수출액-수입액)가 14년 만에 적자를 기록한 데다 원화도 지속적으로 약세를 보이고 있죠. 일본처럼 저성장 늪에 빠진 상황에서 빚으로만 쌓아올리다가는, 결국 버블이 터지는 참사를 맞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방법은 결국 하나일 겁니다. 국민 한 명 한 명, 기업 하나하나가 지금보다 훨씬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해내는 수밖에 없겠죠. 과거 한국이 아무것도 없던 땅에서 지금의 산업과 부를 일궈냈듯, 또 한 번의 혁신과 기업가 정신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입니다. 제대로 된 성장전략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지금 일본이 겪는 딜레마가 머지않아 한국에서 더 크게 부각될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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